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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삭둑이

  • 수경샘
  • |
  • 2015-01-21
25

오늘처럼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어릴 적 외활머니댁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납니다. 햇볕이 드는 대청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하늘도 올려다보고 마루에 누워 천장의 서까래를 바라보며 개수를 세어보기도 했지요. 분합문의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과 마루 가운데 자리잡고 있던 커다란 난로의 온기가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대청마루 복판에 놓여있던 난로 위에는 커다랗고 노란 물주전자가 뿜어내는 스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뚫어져라 바라보다 병아리마냥 졸기도 했습니다. 난로 주변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특별히 울타리가 쳐있던 걸 보면 어린손녀딸을 무척이나 아끼셨던 어른들의 자상함이 느껴집니다.

 

햇살 좋은 겨울날, 할머니께서는 대청마루에 앉아 북어를 방망이로 두드려 껍질을 벗기고 살을 쪽쪽 찢어 발라내셨습니다. 마른 반찬으로 준비하시는 거였죠. 남은 대가리와 껍질은 난로 위 들통 속으로 들어가고 푹~ 끓여 국물을 우려냅니다. 북어 국물의 구수한 냄새가 집안으로 퍼질 즈음이면 커다란 도마와 밀대가 준비되고 메밀가루를 반죽해서 국수를 만듭니다. 도마 위에서 퍼져가는 메밀가루 반죽은 마치 커다란 쟁반이 된 듯, 할머니가 미는 밀대를 따라 사방으로 둥글게 커져갔고 그 모습이 신기해 넋을 놓고 바라보았지요. 어린 나이이지만 할머니의 수석 보조 역할을 자처하며 찰싹 붙어 앉아 봉죽을 들었습니다. 간간이 반죽위에 가루도 뿌리고 반죽을 척척 접어 칼로 썰어낸 국숫발을 커다란 쟁반에 뭉치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털며 술술 풀어 놓았지요.

 

구수하고 진한 북어국물에 잘 익은 김장김치를 썰어 넣고 갓 밀어 만든 굵은 국수발을 풀어 넣고 저으면 뿌옇던 반죽은 맑은 색으로 윤기를 내며 익어갑니다. 드디어 ‘칼삭둑이’가 완성되는 거죠. 할머니께서는 ‘구뚜룸한 칼삭둑이’라며 좋아하셨습니다. 얼큰하고 구수한 국물의 칼삭둑이는 어린나이에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코를 훌쩍거리며 먹기에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할머니의 손맛이 여전히 입안에서 맴돕니다.

어쩌다 그 맛이 그리워 도전해 보지만 구수했던 그 맛은 아니니, 북어의 변심인지 메밀가루의 변심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기대에 가득 차 열심히 메밀가루를 치대고 숙성도 시켜보지만 할머니의 칼삭둑이는 추억 속에 머물 뿐이네요.

 

칼삭둑이는 칼로 삭둑삭둑 잘라 만든다는 말에서 비롯된 순 서울토박이 말입니다. 옛날 궁중에서 썼던 용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십니다. 요즘엔 김칫국에 메밀국수를 넣은 것으로 설명이 되겠지요? 하여간 여름엔 애호박을 곁들인 칼국수가, 겨울엔 김장김치를 넣어 끓였던 칼삭둑이가, 비오는 여름날이나 오늘처럼 햇볕이 좋은 겨울날이면 할머니의 흐뭇한 미소와 함께 떠오르니 나도 나이가 먹긴 했나 봅니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늙었다는데...

그래도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할머니 하면 떼어 놓을 수 없는 음식들이 오늘의 나를 받치고 있으니 나이 듦도 꼭 나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립고 따뜻했던 기억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니까요.

 

할머니의 손맛이 엄마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 내려옴에 감사합니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베란다에 조르륵 놓인 항아리들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고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잘 삭은 젓갈과 몇 년 째 간수를 빼고 있는 뽀~얀 소금도, 김치 냉장고로 그득한 김장김치도 내게는 행복입니다.

예전에 마당 한구석 광 속을 쌀과 연탄으로 채우고 뿌듯해 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습니다.

인스턴트가 판을 치고 전화 한 통화면 모든 음식이 코앞에 진상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서성대는 내 모습이 좋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김치를 담는다는 말은 나는 쓸데없는 중노동을 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말이라고요. 누군가에겐 중노동이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이며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 또한 못지않은 중노동이라면 중노동이겠지만 아이를 거부하는 엄마는 없습니다. 최소한 제대로 된 엄마라면요.

겨울 볕이 따뜻할 때, 내 아이가 옆에 있다면 따뜻함이 배가 되고, 아이와 함께 맛난 것을 먹노라면 아이가 먹는 모습만 봐도 엄마의 얼굴엔 미소가 묻어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도 되니, 이처럼 소중한 중노동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아이와 반죽도 같이하고 과자도 함께 구우며 할머니에서 엄마, 그리고 나에게로 전수된 손맛이 내 아이에게도 전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나보다는 더 바쁜 세상을 살아갈 아이겠지만, 이왕이면 내 아이도 나와 같은 행복을 자신의 아이와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햇볕이 따뜻하고 화창한 겨울 날, 구수한 북어 국물에 김장김치 숭숭 썰어 넣고 끓인 칼삭둑이를 땀을 흘리고 코를 훌쩍이며 맛있게 먹을 내 아이를 상상해 봅니다. 비록 그 맛은 달라도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내 아이도 행복해 하겠지요.

 

길다고 해도 길지 않은 인생이며 아이와 함께 하는 날들이 많은 듯해도 오롯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직은 아이가 나와 함께 마주하는 시간이 넉넉할 때, 아이와의 추억 쌓기에 시간을 할애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크는 것도 잠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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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령돌맘
  • |
  • 2015-01-22 11:30
답댓글

 

점심시간이 다가오니..

수경샘님의 글에 더욱 배가 고파지네요~~

처음에 제목을보고.. 칼싹둑이가 뭔가 했어요~

지금 늦둥이가 16개월인데.. 가지고 노는 장난감중에... 소꿉놀이지요.. 그중에 과일 싹둑이가 있거든요..

뭐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ㅋㅋㅋㅋ

 

저는 울 친정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지 못했답니다...

아이들이 할머니가 해준 음식 먹다가 제가 해준 음식 먹을때면....

그냥 라면 먹는다고.. ㅜㅜ

 

울 친정어머니도...

지금까지 딸을 위해 이런저런 반찬과 음식손질 정말 다해주시네요...

언제쯤 엄마에게 사람구실하며 살지 ......

수경샘 글읽고 울 아이에게도 울 친정엄마 같은 엄마가 되줄수 있을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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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경샘
  • |
  • 2015-01-23 13:30
친정 어머니의 손맛을 꼭 익혀두시길 강추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거든요.
저는 외할머니의 손맛을 조금 더 성장했을때 까지 느껴보지 못한 것이 정말 많이 아쉽습니다.
너무 어렸어요.
제가 컸을 때는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고, 이미 살림에서 손을 놓으신 후였지요.
그런데 가시고 나니 더 많이 보고 배우고 느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합니다.
친정어머니가 하시는 음식 역시 외할머니 맛이지만, 할머니가 왜이리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령돌맘님도 잘 하실거라 믿어요.
음식도 관심이 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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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페라공주
  • |
  • 2015-01-21 23:38
답댓글

야밤에 수경샘님 글을 읽으니 배가 고파지네요...ㅋ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아요...

어릴적 엄마가 홍두깨로 밀어서 만들어 주신 칼국수도 생각나고

엄마가 반죽 밀어 얇게 펴주면 오빠랑 제가 주전자뚜껑, 병뚜껑으로 동그라미 찍어서

기름에 튀겨주시던 도넛도 생각나고

계란거품 엄청 내어서 만들어주신 카스테라도 생각이 나네요...

울엄마가 예전에 저한테 이랗게 해주셨었네요...

까맣게 잊고 살았어요...ㅎ

그런 엄마가 지금 아프신데

제가 더 잘 해드려야겠어요...

수경샘님~옛 추억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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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경샘
  • |
  • 2015-01-22 11:01
맞아요ㅋㅋ
주전자 뚜껑으로 꼭꼭 눌러 뜨기. 재미있지요.
저도 기억나네요.
그러고 보면 뭔가 불편했던 시절이 손가는 음식도 많이 하고 더 정겨웠던 것 같긴 합니다.
오손도손 둘러 앉아 손이 모아져야 뭐라도 맛있게 해 먹었으니까요.
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장난도 해 가며,
엄마에게 잔소리도 들어가며... 그렇죠?
항상 새롭고 편리한 것만 좋은 건 아니네요~
저도 오페라 공주님 덕분에 잊었던 추억이 떠올라 미소짓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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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사랑
  • |
  • 2015-01-21 23:28
답댓글
수경샘님 덕분에 읽는내내 침을 꼴딱꼴딱 넘기며 배에선 꼬르륵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수경샘님의 추억거리에 자제분도 행복하셨을거 같네요..
저도 울 아이들과 하나하나 추억을 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경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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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경샘
  • |
  • 2015-01-22 10:57
ㅎㅎ
저도 글을 쓰면서 아, 먹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음식만들기도 식구들이 좀 많고 북적거려야 제맛인데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혼자 먹을 때도 많네요ㅜ.ㅜ
엄마가 해주는 음식 좋아라 하고, 엄마와의 시간에 아이가 함께 해 줄 수 있을 때
좋은 기억 많이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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