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대학 합격 소식을 접하던 순간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감격스럽다. 남편은 먼저 부임지로 훌쩍 떠나 버리고 나와 딸은 학교 앞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고3 마무리를 하던 중이었다. 발표 예정 시간을 제법 넘기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초조한 아이는 자기 혼자 합격여부를 확인하고 싶다며 나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컴퓨터에 수험번호를 클릭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갑자기 이상한 노래 소리가 들렸고 ‘엄마, 나 붙었어’ 하며 아이가 소리 질렀다. 아랫집 사람들이 잠들었을 시간이라는 것도 잊은 채,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껑충껑충 뛰었다. 벌써 햇수로 6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느낌이다. 내가 늙어 치매에 걸릴 지라도 이 날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다.
학비를 어떻게 누가 조달할 것인가를 첫 질문으로 학교 입시전담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고2를 마치던 5월쯤으로 기억한다. 미국의 사립대학 등록금이 워낙 비싸므로 미국 부모들에게는 경제 여건이 아이 학교 선택에 가장 큰 요인인 듯 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만 가준다면 논이고 밭이고 모두 팔아 학비를 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한국부모들에게는 매우 현실적이고 냉정한 질문이었다.
말로는 장학금을 받아야만 미국대학에 갈 수 있다 했지만 막상 원서를 쓰며 재정 지원(financial aid)을 받겠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순간이 되니 행여나 불리할까, 일단 붙고 보자 하는 생각이 앞섰고, ‘안 받겠노라’ 에 표시를 했다. 그저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으니 이것이 맹목적이고 무모한 교육열이 아니고 무엇이랴. 정말 다행스럽게도 대학 4년은 장학금 덕분에 잘 넘길 수 있었다.
내가 유학 하던 시절 집에 심각한 경제적 문제가 생겨 한동안 송금을 못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엄마는 생활비 보내주실 일이 어려워 나를 서울로 불러들여야 할지를 무척 고민하셨다는데, 그 때 내리신 결정이 지금도 두고두고 감사하다. 머리에 넣어주는 재산은 남이 빼앗지 못하는 것이니 어떻게든 공부를 마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뛰어나게 잘하여 자랑스러운 자식은 아니었지만 가능성을 믿어주고 끝까지 뒷바라지 해 주신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이런 부모님들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대학원에 진학 한 딸아이는 열심히 자기 삶을 준비하고 있다. 난 두 번째 해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이리저리 애쓰고 있고 말로는 나중에 취직해서 돈 벌면 학비 대준 것 다 갚으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제 앞가림만 잘하고 살아도 고마운 일이라고, 그게 우리 부부의 노후 보장 첫 번째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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