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산책 첫 시간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알아보고 그림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려고 합니다.
바로크 하면 루벤스와 렘브란트가 떠오르실텐데요,
제가 렘브란트를 선택한 이유는 두 장의 그림 때문입니다.
1)책상에 앉은 티투스(1655)

헤밍웨이 명화전집 렘브란트편(제가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떨어집니다.)
첫 번째 그림은 바로 이 그림입니다.
<책상에 앉은 티투스>라는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외동아들을 그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먼저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일찍 죽고
하나 남은 아들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했겠습니까?
아마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모든 것을 다바쳐서 정성을 대해 그렸을 것 같아요.
그 마음이 그림에 녹아 있는 듯 볼 때마다 거울사건이 떠오르면서 저는 가슴이 저려옵니다.
아내가 죽고 파산한 렘브란트는 집과 그림까지 모두 압류당하고 맙니다.
그 때 어린 티투스는 저금통을 털어 경매에 붙여진 렘브란트가 아끼던 거울을 되찾아 옵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어찌나 들떴던지 오는 길에 그만 돌부리에 넘어져
겨우 얻은 소중한 거울을 깨뜨리고 맙니다.
울상이 되어 돌아온 티투스를 안고 렘브란트도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티투스와 렘브란트가 서로 안고 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안타까우면서도 어찌나 감동스러운지요.
2)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1660)

그리고 다른 한 장은 이 자화상입니다.
렘브란트는 죽기 전까지 드로잉과 판화를 포함하여 7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말년의 자화상에 속하는 작품으로
그동안의 삶의 무게와 고생, 슬픔, 가난이 모두 묻어나고 있습니다.
부와 권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을 외면하지 않고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 비평가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고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그릴 수 있는가?
실로 무정하고 무자비한 기록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거울을 볼때 실제의 자신보다 3배는 예쁘게 보인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자화상과 비교해 보세요.
자신만만하고, 자부심이 넘치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을 잘 그려냈습니다.
젊은 날의 자화상(1632)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으로 몰락한 자신을
한치의 미화도 없이 이리 냉정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요?
모든 것을 다 잃고 낡은 옷과 그의 유일한 유산이었던 미술도구와
늙고 병든 자신까지 남아있는 모든 것을 한 폭에 거짓 없이 다 담았습니다.
그의 일생을 알고 있다면 이 한폭의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렘브란트는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글구 도대체 파산은 왜 한거야?
3)틜프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1606년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제분업자(어떤 책에서는 방앗간으로 나오지만
부유한 편이었다는 걸로 봐서 작은 방앗간은 아닌게 분명해요.)
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난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희망으로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지만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그만두고 스와넨브르크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라스트만의 제자로 6개월간 공부를 더 합니다.
그 뒤 1624-1632년까지는 독학으로 친척, 이웃 노인, 성서 그림등을 그리다가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 조합으로부터 주문 받은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호평을 받고
일약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지요.
그전의 단체초상화들이 엄숙하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에 비해
이 초상화에서의 인물들은 표정이 다 살아있지요?
자못 심각한 표정이나 진지한 표정도 정말 열심히 강의를 듣는듯해서
그림속의 주인공은 얼마나 뿌듯했겠어요.
이 그림 한 장으로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된답니다.
4)플로라(1634)

헤밍웨이 명화 전집 - 렘브란트편 (제가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떨어집니다.)
<틜프박사의 해부학 강의>로 호평을 받은 뒤로 네덜란의 부유층과 친해진 렘브란트는
1634년 명문가의 딸 사스키아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가 렘브란트의 화려하고 행복한 가장 멋진 시절일겁니다.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했을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의 부유층으로부터 그림주문이 쇄도하여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렸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겠지요?
사스키아는 엄청난 지참금을 가지고 왔을뿐 아니라
렘브란트를 진심으로 너무나 사랑해서 그들 앞에 슬픔이나 두려움은 전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앞서 본 젊은 시절의 초상화에서의 당당한 모습이 이해가 되지요?
그러나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 명성으로 이제 렘브란트는
사람들이 주문한대로 그리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본인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5)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가 중위에게 시민 사수대의 출발 명령을 하달하다(1642)
이 굉장히 거대하고 웅장한 그림은 렘브란트의 걸작이자
렘브란트를 몰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한 동안 <야경> 또는 <야간 순찰>로 잘못 알려진 이 그림은
아직도 많은 책들에 그 제목으로 적혀 있기도 하는데
진짜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가 중위에게 시민 사수대의 출발 명령을 하달하다>라고 합니다. 그림이 상하지 말라고 니스칠을 여러번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검게 변하여 야간 순찰을 하는 사람들을 그린 것으로 오해받은 거지요.
명암과 원근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현대 비평가들과 많은 사람들은
이 걸작으로 렘브란트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하지만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이 당시 단체 초상화는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 화가에게 전달한 것이므로
한 명, 한 명 모두 자신이 얼굴이 잘 나오길 바랬겠지요?
그래서 단체 초상화는 여행지에서 찍은 단체사진처럼 모두 비슷하여
별 특징이 없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펨브란트가 그린 이 그림은 한 편의 영화 포스터처럼
주인공은 가운데에서 밝은 빛과 멋진 위용을 자랑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마치 엑스트라같잖아요.
돈을 준 사람들은 자기가 엑스트라처럼 그려진 것에 대단히 기분이 나빴고,
비평가도 전통을 무시하고, 그림도 제대로 모르는
오만하고, 거만한 화가의 실패작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363×437cm의 이 거대한 그림은 소송과 악평으로 화가를 몰락으로 이끌었는데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6)돌아온 탕아(1668-1669)
<프란스 반닝 코크 대위가 중위에게 시민 사수대의 출발 명령을 하달하다>의
대중적 실패와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으며 렘브란트의 힘든 시절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으로 심경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을테고,
주문자의 요구 대신 화가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자 그림주문은 점점 없어졌고,
또 씀씀이는 줄지 않아 경제적으로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아들 티투스를 돌보려고 고용한 유모와 동거하면서
사실혼 관계에 있던 렘브란트는 다른 유모를 고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 젊고 당차고 아름다운 두 번째 유모 헨드리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 첫 번째 유모는 법정에 렘브란트를 고소하게 하면서
유모들과의 스캔들로 명성에 치명적 타격까지 받게 됩니다.
첫 번째 유모와의 소송에서 이겼지만 위로금조로
매달 일정 금액을 첫 번째 유모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고
두 번째 유모 핸드리케와 같이 살게 됩니다.
핸드리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데
사생아를 낳은 것으로 종교재판소에 드나들면서도
렘브란트 곁을 죽을때까지 지키게 됩니다.
사시키아는 죽으면서 모든 재산을 아들 티투스에게 남기고
재혼을 하면 모든 재산을 렘브란트가 쓸 수 없도록 유언을 남겼던지라
오랫동안 결혼식도 없이 핸드리케는 티투스까지 돌보게 됩니다.
알거지가 되어가는 렘브란트를 끝까지 곁에서 지킨 핸드리케도 대단하지만
죽은 뒤에도 자신곁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사스키아 또한 대단한 여자지요?
그러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고단한 삶의 렘브란트였지만 핸드리케의 헌신적 내조로
이 시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렘브란트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됩니다.
렘브란트가 죽던 마지막 해에 완성한 <돌아온 탕아>는
아마도 그의 고된 인생을 마감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모두 기록된 걸작이라고 보여집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흥청망청 쓰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속에서 자신을 보았던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신이지만 하느님만은
모든 걸 용서하시고 받아주실거라고 믿은게지요.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종교화를 엄청나게 많이 그린 렘브란트가
말년에 이러한 그림을 그린 이유는 그것이 아닐까요?
오른쪽 끝에 그걸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큰 형은 세상의 눈일테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렘브란트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구원의 모습을 찾은건 아닐까요?
1662년 핸드리케가 죽고 1668년 티투스마져 세상을 떠나자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 모든 열정을 쏟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그림을 마치고 그해 10월 렘브란트도 가난한 유태인 거주구역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래되고 낡은 미술도구만을 남긴채.
평생을 유복하고 평탄하게 지낸 루벤스의
강렬하고 열정적인 그림들은 참 멋지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가진 것과 같은 정점에서 나락까지 떨어진 렘브란트의 일생이
녹아있는 그의 드라마틱한 걸작들은 저에게 무언가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여러분은 어떤 말이 들려오나요?
주참고도서 : 헤밍웨이 명화전집 렘브란트편.
그림 밑에 출처를 밝히지 않는 그림은 위키백과의 그림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내용을 그대로 베끼기보단 다른 말로 바꾸어 쓰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짜깁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특히 미술사가들은 렘브란트의 일생으로 알려진 일화들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구적 요소가 강하다는 평도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위 내용이 정확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예전에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 하나를 가지고 소
설을 만들고, 영화도 만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회자되는 얘기들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과 어찌나 맞아 떨어지는지
그러한 내용들을 취합하다보니 하나의 소설처럼 만든것 같기도 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너무나 유명해서 이런 얘기들이 지어지기도 하도
위작도 많아서 진품을 밝히는 것도 어렵다고 하는군요.
그냥 재미난 이야기로 명화를 쉽게 볼 수 있도록 구성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림 몇 장만 올려야지 했다가
화가의 전기를 읽으면서 줄거리를 가지면 그림 이해가 더 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고 제 맘에 들지도 않고,
조회수까지 높지 않은지라 고민을 많이 하게 된겁니다.
저번에 올린글이 댓글 올리려고 한 게 아니라
사실은 발을 빼고 싶은데 어떻게 잘 해야할까하는 고민의 글이었습니다.
그냥 큰 무리없이 아는 분들과 공유하는 정도로 모임터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시작한거 제가 아끼는 몇 분들과 공유하면서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밤에 스맛폰으로 올린 글이라 감정적이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그래서 고야까지는 예의상 가보고 그 뒷 이야기는 모임터로 들어가서 계속 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친절하게 모임터로 손을 잡아 주신 마굴맘님의 답례로
마굴맘님 모임터에 2-3주 한 번 대문글로 올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것은 명화산책 첫 번째 이야기의 댓글달아 주신분들이
대개 그 모임터 회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움직였는데
모임터의 분들이 허락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을 적어봅니다.
어찌되었던 댓글 달아준 분들에 대한 최대한 예의는 지키면서
큰 무리없이 진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시작했으니 도움이 되는 분들을 위해 피카소까지는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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