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영어강사입니다.
원서 실컷 읽히며 살아있는 자연스러운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은
이 곳 학부모님들의 '문제집' 선호에 밀려 시작도 못해보고 일반 학습지로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곳이 워낙 '단어 달달 외우기'를 선호하는 분위기라서요.
오히려 옆에서 보시던 동료 국어선생님께서 작년 10월 말에 예비초등 자제분 영어를 부탁하셨어요.
제가 초등 고학년 이상부터 가르치기 때문에 abc부터 가르쳐보기는 처음이라
사실 좀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학습방향이나 진도는 절대 노터치, 큰 욕심 없으니 영어로 놀아만 달라'는 말씀에 조심스럽게 시작했습니다.
고맙게도 처음 약속대로 정말 노터치하시더군요.
...음...그래서 숙제체크도 노터치.복습도 노터치. 집에서 영어 노출 제로.
저하고 하루 10-40분 공부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영어 노출량이 워낙 적어서 문자 학습이 먼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생각하는 abc'라는 책으로 시작했어요.
그림 속에 알파벳이 숨어있는 책인데 한 이주일동안 방안에서 알파벳 모양 찾기, 몸으로 알파벳 모양 만들기 게임으로 신나게 보냈습니다.
삼성 출판사 '그림책으로 영어시작' 두어권만 세 번 정도 재밌게 읽어주고
알파벳 소문자 차트를 오려내서 대문자 차트에 한 줄씩 제대로 올릴 때마다 공주님, 왕자님, 여왕님, 임금님 구하기 같은 설정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못알아듣는 영어만 하면 스트레스 받아해서 모든 말은 영어로 하되 바로 한국어 주석 달아줬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아이가 듣는 말은 한국어고 영어는 배경음악이었죠.
영어 노래도 시도해봤지만 별로 안 좋아해서 바로 접었습니다.
첫 이주일간의 소득은 알파벳 습득, go, run, eat,book 같은 기본 단어 몇 개 소리로 익히기,
선생이 영어로 불라불라해도 스트레스 안 받기, 그리고 영어란 엄청나게 재밌는 것이라는 인식이었죠.
이러다 영어 선생이 아니라 게임 개발자 되겠다는 소리가 나올만큼 매일매일 새로운 게임을 개발해서 놀아줬거든요.
그 다음 일주일은 파닉스 입문.
아직 책은 사용하지 않고 b = 브~(뱃고동 소리) c= 크크크(입 가리고 웃기) d= 드드드 (굴착기 흉내)
h= 흐흐흐 (호탕한 아저씨 웃음) s= 스~ (뱀 기어가는 흉내) ... 이런 식으로 자음 음가를 익히면서
역시나 엄청나게 놀았습니다. I run! 이라고 외치면서 먹는 흉내내기, Where is my book? Here it is! This is my book. 이라고 말하면서 책 대신 아이 똥꼬 가리키며 찌르기 -_- 뭐 이런 놀이를 좋아하더군요.
I am a lion같은 간단한 책을 읽으며 오바 연극놀이도 조금 했구요. 참 알파벳 놀이도 병행.
그 다음 한 달 남짓 서점에 있는 파닉스 책 중에서 제일 단어 적고(50단어)
그림 큰 걸로 (책 제목이 생각이 안 나네요) 하나 진행하면서
'생각하는 abc' 중 아무 페이지나 펴서 대충 무슨 발음 날까 맞춰보기 게임으로 보냈습니다.
이 때는 상당히 학습적으로 나갔어요. 책도 별로 안 읽히고 파닉스에 전력투구했거든요.
게임의 탈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밀크에는 어떤 스펠링이 들어갈까? 노트북은? house는 어떤 발음?
매일 15분 정도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으니까 아이도 조금은 힘들어했죠. 모음 음가는 거의 안 했고
자음만 했는데 역시 첫소리와 받침으로 모두 사용되는 l,m,n을 제일 힘들어하더군요.
그래도 좀 익숙해지니까 천재소리 듣는 재미로 단어 외우기를 꽤 재밌어하더군요.
(스펠링보다는 그림 보고 단어 맞추기에 더 가까웠지만요)
웃기는 건 단어 읽기 게임에서 등급을 스스로 정하게했더니
천재, 사범님, 임금님,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대마왕님 그리고 최종단계는 teacher라는 거! 푸하하.
여하튼 가열차게 놀아줬습니다, 이 때도.
이 때쯤 국어선생님께서 '영어 1년 배운 옆집 아이보다 두 달 배운 우리 애가 더 낫더라'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이시길래 비로소 안심했습니다. (애초에 파닉스에 주력했던 이유는 역시 학부모 눈치때문..)
다음 대박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파닉스 스토리북'이었습니다.
한동안 저의 이름은 dirty teacher -_- jumping teacher, ***** teacher가 되었습니다.
이 교재 또한 엄청나게 역동적으로 엄청나게 우스꽝스러운 액션으로 같이 놀아줬더니
아이가 자지러지더군요.(전 유치원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동시에 진행했던 다른 책들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도 스토리북에 주력했구요.
그리고 대망의 sight word readers.
이 때까지는 저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 이외에는 영어 노출이 정말 제로였는데
"you are not a baby any more. Study hard!! You should study really hard!"
라고 협박도 엄청 하고 다 읽을 수 있게 되면 무슨 구슬 비즈 로봇인가 뭔가를 사주겠다는
당근도 주면서 집에서 듣기를 좀 시켰습니다. (하루에 2~5번 정도)
듣기도 많이 늘었고 비로소 슬슬 진짜 '읽기'를 시작하더군요.
연말 연시, 휴가에 명절이 겹쳐서 이 때는 진도가 느렸어요.
교재가 부족한 대신 하나라도 확실히 한다는 생각으로 저도 반복을 많이 했구요.
책 전체를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1달 반정도 걸렸던 것 같네요.
다른 책도 조금씩 했지만요.
이게 끝나고나서부터는 좀 수월해졌어요.
영어로 말해도 엔간히 알아듣고 (눈치로) 새로운 문장이나 단어를 습득하는 속도도 확실히 빨라졌죠.
이후로 그림책으로 영어시작 1, 미국 교과서 1학년, 한 줄짜리 동화 20여권을 스스로 읽기 버전으로
다시 보거나 새로 보았죠. (제일 글밥 많은 책은 five little monkeys sitting in a tree였고 반응도 대박)
지금 5개월을 딱 채웠는데 영어시작은 2단계 중간까지 나갔고 맥그로힐 basic 1 (코스북처럼 나온 것)
거의 끝냈어요. 역시 노출량이 적어 아웃풋은 그럴싸한 게 없지만 저를 보고 Who is he? 라고 하길래
엄청 억울해하면서 'he? Did you call me he? I'm a beautiful teacher. And you just called me he? '
라고 했더니 키득거리면서 ' Who is she?' 라고 고쳐 말하면서 자기 고추를 가리키며 'who is he?'
라고 하거나 방청소 하라고했더니 "NO,no,no, lots of no' 말하는 정도는 겨우 됩니다.
알파벳 제대로 외운 이후로 쓰기는 거의 안 하고 있지만 스펠링에 대한 민감성이 있어서
한 번 보고 스펠링 말해보라면 거의 제대로 말하더군요.
쑥쑥 아이들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영어실력이지만 참으로 제한된 교재에
제로를 향해 치닫는 숙제량에 상당히 제한된 영어 노출로 이 정도 왔다는 것,
무엇보다도 영어는 쉽고 재밌는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지켜왔다는 것에 점수를 주고싶네요.
그 유명한 ort를 하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군침만 흘리고 있습니다.
리터리시 플레이스 1.1을 읽을 정도면 2단계부터 구입해도 될까요?
워낙 학군이 낮은 동네라 아이 부모님은 지금도 대만족이시지만 제 입장에서는
늘 교재와 시간의 압박에 쫒긴답니다.
사족으로 전 미혼이지만 어린 아이를 가르쳐보니 왜 부모들이 다' 우리 애는 천재'라고 믿는지 알겠어요.
ㅎㅎ. 아이라는 존재는 정말 어른을 깜짝깜짝 놀래키는 존재더군요. 학습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감성에서도요.


쑥쑥몰
체험이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