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세군데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외부 장학재단은 중복 수혜가 허용되지 않기에 한군데만 선택해야했다.
대학 들어가서는 힘들게 학업을 수행하였기에 교내 장학금 겨우 받을 수 있었지만
장학금을 받던 그날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의 젊은 시절이 부끄러워졌다.
아이들에게는 털어 놓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다.
나는 대학다니며 장학금을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고 무시무시한 사립대학 등록금을
부모님 허리가 휘도록 4년 내내 갖다 바쳐야 했던 기억이 났다.
누런 봉투에 엄마가 주시던 묵직한 돈봉투의 무게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큰 돈을 대학에 갖다 바치면서도 학업에 열중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과 재수시절 이후, 공부의 해방감에 맘껏 놀아보자..이 생각 뿐이었다.
별 생각 없이 대학을 다녔다.생각이 있었다면 취직 걱정이었다.
아침부터 학교 도서관으로 출근은 했지만 부모님이 주시는 등록금과 용돈의 무게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흘려버린 내 젊은 시절이었다.
학업에 열중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한 것도 아니고..세월은 그냥 흘렀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 생각 없이 취직했고 결혼을 했다.
남편은 어려운 환경에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지만 가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렵게 대학공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쳐야 했다.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난한 대학생이야기이다.
형편으로는 대학 졸업후 취직을 해야했지만 대학원을 진학했고 학업을 계속 했지만
오로지 학업에 열중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당시 장학금 제도가 요즘 처럼 다양하고 좋았다면 아마 더욱 학문에 정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아이가 장학재단의 장학금 받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끼게 되었다.
아이가 대학입학후 처음 교내 장학금을 받던 날..물론 전액은 아니었지만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살아오며 가장 기쁜 날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아이가 대학 1학기 끝내고 2학기 장학금 받던 날
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평범한 일반고를 다니고 겨우 대학에 합격하여 대학 1학년을 다니며 아이는 학업수행을 힘들어 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고3 아이를 지켜보는 것 보다 더 우울했다.
특히 요즘 대학의 학점은 고등학교의 내신과 같아서 학점이 좋지 않으면 뭘 해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학교 바로 옆으로 방을 얻어 옮기고 도서관을 공부방 삼아 공부를 했다.
고3시절 하루 5,6 시간 잠을 잤지만 도서관에서 1주일 밤새우기는 보통이었다.
고3 시절에 버금가는 공부를 했던 것 같다.대학가니 불행 끝 행복 시작...이것은 아니었다.
나와는 다른 대학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저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부모로써 이해할 수 없었다.
더 높고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산은 꼭 올라야만 하는 산은 아니었다.그러나 결국 아이는 그 산을 올랐다.
그 산을 오른 댓가로 대학에서는 장학금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물론 과톱이 아니기에 소액이었지만 그 장학금을 쪼개 여기저기 기부를 하였다.
아이 고3 시절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면 그 대학에 얼마든지 기부를 하겠노라는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니 더 큰 산이 높이 솟아 있었다.
외부 장학재단의 장학금이었다.
외부 장학재단은 성격이 다양하지만 우리집은 아이들의 대학공부 뒷바라지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모의 능력이기에 외부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외부 장학재단의 경우 등록금과 생활비등 상당히 고액이 지급되기 때문이고
장학재단의 성격에 따라 부모의 재산세와 연봉을 고려해서 장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하라는 얘기는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남편이 어렵게 공부했기에 아이들은 편하고 여유롭게 공부 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아이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다.
아이는 이제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고 도전해 보기로 한 것 같다.
1차 합격 통지서가 날아오던 날...특별히 우수하다면 예외의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능하겠구나!
아이들 어려서 부터 아이들의 꿈을 위해 우리 부부는 정말 검소하게 살았다.
아이들을 학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유학도 보내야 하고 뒷바라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국내에서 박사를 했던 남편은 아이들을 반드시 미국으로 보내 공부를 시키고 싶어했고 이런 남편의 뜻은 아이들 어려서 부터 공부의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이다.
꿈이 있었기에 검소하게 살고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풍요로웠다.
아무튼 아끼고 아껴 모은 돈으로 통장 하나가 늘어날 때 마다 이것은 큰아이의 1년 학비..
또 하나의 통장을 만들면 이것은 작은 아이 학비...행복했다.
그러나 어느날 아이들은 부모의 돈으로는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유학을 가고 싶고 공부를 계속 하고 싶지만 부모에게 의지해서 공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뒷바라지 했으니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민사고 입시 실패 이후 유학을 보내달라고 조르며 울던 아이가 벌써 자라 철이 든 것이다.
부모님이 평생 절약하고 열심히 일하신 댓가는 부모님의 풍요로운 노후를 위해 쓰라는 것이었다.
섭섭하기도 했고 우울하기도 했다.열심히 일해 자식 공부시키는 것 만큼 큰 희망도 없는데..
하지만 한편...내 인생도 있는 것이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두아이 계속 공부 시키다 보면 우리 부부의 노후는 누가 책임져 주나?
공부 시켜놓았으니 우리 노후를 자식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이는 장학재단의 면접을 하며 부모님에게 의지해서 유학을 가야한다면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다른 진로를 찾겠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학업을 수행하며 학비를 벌기위해 일을 하며 공부를 하다보면 공부에 전념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장학재단은 아이의 뜻을 받아주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 최고의 학점을 받으며 틈틈히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논문을 써서 사회발전에 공헌을 했으며
또한 소외계층의 아동 청소년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온 점등을 높이 산 것 같다.
아이는 주말마다 지역 아동센터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수학공부방에서 아이들 공부멘토가 되어주었다.
외부 장학재단의 특징은 공부만 잘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의 사회공헌도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상당히 고려하는 것 같다.
물론 장학재단의 선후배들이 모여 봉사를 하고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 주는 특징이 있다.
이미 선배들은 유학을 가서 학위를 마치고 자리잡고 후배들을 위해 물심양면 애쓰고 있었다.
아이도 장학금 인터뷰와 선후배 모임을 하며 나중에 큰 돈을 벌어 공부에 야망이 있는 인재들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 꼭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고 한다.
아이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이 받은 것을 사회에 꼭 되돌려 줄 것 이라는 다짐을 하고 산다.
아이가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갈지 로스쿨을 갈지 취직을 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가지 희망이 생겼다.
국가와 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워주고 있다는 든든한 희망.
아이를 키우며 어려가지로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든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가 대학공부까지 시켜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아무생각 없이 대학을 다녔던 내 젊은 시절이 너무 부끄럽고...
아이들을 키우며 도대체 국가와 사회는 우리를 위해 뭘 해주고 있냐고..
불평불만 하던 내가 부끄럽다.
치열한 노력을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 몇배의 댓가가 있다는 것을
아이를 통해 깨닫게 된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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